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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리 연주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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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 너무도 괴팍했던 무결점의 천재 ”

이 사진을 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냉혈한? 카리스마? 천재? 프레디 머큐리를 닮은 이 사람은 천재 중의 천재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이다.


20세기를 살았던 음악가 중 대다수는 ‘천재’의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클라라 하스킬은 찰리 채플린이 인정했던 천재였고 토스카니니는 200여 곡이 넘는 곡의 악보를 완벽하게 암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발터 기제킹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암보를 했던 연주자로 꼽히는데 단 하룻밤이면 암보가 끝났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일일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듯 하다. 정말 그들의 손과 뇌가 부러워질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는데 그렇게 천재적인 인물들이 판쳤던 20세기 음악계에서 딱 한 명의 천재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난 이 사람의 이름을 대고 싶다. 너무도 신경질적이었고 너무도 완벽함만을 추구했던, 그 이름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이다.

자. 그럼 미켈란젤리란 사람이 얼마나 천재였는지에 대한 사례들을 간단하게나마 나열해볼까? 놀라지 마시라.

-그는 의사였다. 14세라는 믿기 힘든 나이에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한 뒤 6년간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공군조종사였다. 애국심에 불탄 청년이었고 나치를 혐오했던 그는 공군에 자원입대, 2차 대전에 참전하여 공군조종사로 활약했다. 그리고 포로수용소에 8개월간 수감되었고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카레이서였다. 그에겐 인체, 피아노, 전투기, 자동차 등 전혀 성격이 다른 물체들이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복잡한 것 같지만 질서 있게 움직이는 유기체라는 점에서 인체, 피아노, 전투기, 자동차가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그 질서와 경로, 원리만 알면 아무리 복잡한 기계도 그에겐 간단해 보였다.
-한 대의 피아노를 완벽하게 분해하여 다시 완벽하게 조립할 줄 아는 연주자였다. 어느 누구도 미켈란젤리만큼 피아노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들끼리 이런 내기를 한다. 어떤 연주자의 어떤 곡을 듣고 과연 미스터치가 몇 개가 나올지.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미켈란젤리의 연주에 미스터치가 있는 쪽에 돈을 건 사람은 돈을 딴 적이 없다. 그의 연주엔 단 하나의 미스터치도 없다.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였다. 작곡과 바이올린도 공부했다.
-그는 뛰어난 교육자였다. 말이 필요 없는 두 사람. 폴리니와 아르헤리치가 그의 제자였다.

이 정도이다. 훗~. 그런데 그는 그 천재적인 성격 대신 너무도 완벽함을 추구했고 그래서 너무도 괴팍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그의 괴팍, 까탈스러운 성격의 일화들을 나열해볼까?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녔던 연주자. 이런 사람 또 있다. 바로 호로비츠. 둘 다 성격은 도찐개찐이다.
-연주회 취소의 대명사. 손이 시려서 못해, 청중이 기침하니까 기분 드러워서 못해, 게다가 애지중지 싸 갖고 댕기는 피아노가 상태가 안 좋아? 그럼 당연히 못해.
-뒤끝 엄청 강한 사람.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이탈리아가 훗날 자신의 명예를 건드리는 짓거리를 하자(이 부분은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미련 없이 스위스로 망명한다. 그리고 스위스 망명 후 이탈리아 땅을 바라보곤 오줌도 누지 않았다. 그뿐 인줄 아는가? 자신의 연주회에 이탈리아인들이 입장하는 것은 절대 불허했다. 1975년에 열린 바티칸 연주회에선 8천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인을 모두 강제 퇴장시켜버렸다. 그리고 1993년에 열린 런던에서의 공연에서 주최측이 몰래 80장의 표를 이탈리아인들에게 판매한 것을 알자 너무도 당연히 공연을 취소시켜버렸다. 어떤가? 뒤끝 끝내주지?
-웃지 않는 사람. 그는 어떤 경우에도 청중들 앞에서 웃지 않았다. 항상 근엄하고 오만한, 그래서 무척 무섭게 느껴지는 인상만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야긴데 그의 사진 중에 빵긋 웃고 있는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제5회 쇼팽 콩쿨. 미켈란젤리는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심사결과 자신이 생각한1위와 2위와 뒤바뀌었다며 심사위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 2위의 피아니스트는 누구였을까? 그 이름도 유명한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였다.
-인상만 오만한 것이 아니라 성격 자체가 무척 오만했고 또 외로웠다. 그래서 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인생 자체를 즐길 줄 몰랐고 만족하지 못했다.
-부인을 대동하지 않는 사람. 그는 공식석상에서 부인을 대동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미혼남성인줄 알고 있었다.


글쎄? 이 정도면 빵긋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을까?


미켈란젤리는 1920년 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법률가이면서 음악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서 세 살짜리 어린 아들에게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을 비롯한 다방면의 음악교육을 시켰다. 9살 때부터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학원(Conservatorio di musica “Giuseppe Verdi” di Milano)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14세에 무척 빨리 졸업을 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미켈란젤리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힘든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는 없었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학공부에 매진하였다. 그의 나이 19세때까지였다. 이와 비슷한 사람 또 하나 있다. 20세기 바이올린의 神(나만의 생각인데 이렇게 표현하면 딴지 걸 사람 많을까?), 프리츠 크라이슬러이다. 하지만 크라이슬러와 미켈란젤리의 성격은 하늘과 땅 차이다.

18세엔 드디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2회 국제 콩쿨(훗날 퀸 엘리자베스 콩쿨이 된다)에 출전, 7위에 입상하였다. 이 때 1위는 그 유명한 소련의 에밀 길렐스였다. 이때부터 미켈란젤리는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사진. 1938년에 열린 콩쿨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 키작은 사람이 일등먹은 길렐스. 그리고 맨 오른쪽 키 큰 사람이 미켈란젤리.


그 다음해, 미켈란젤리는 다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콩쿨에 출전하여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게 되는데 바로 이 콩쿨에서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때 유명한 일화. 하스킬의 스승이기도 했고 20세기 전반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하나로 꼽혔던 알프레도 코르토에게서 ‘a new liszt’라는 극찬을 받았다. 바로 제네바 콩쿨에서 1위를 함으로서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인생을 음악에 바치기로 결정하게 된다.

괴팍? 하지만 철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마치 밥 먹듯이 연주회를 취소하는 일이 잦았고 너무도 완벽함만을 추구했기에 까탈스럽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미켈란젤리.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그토록 까탈스러운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였고 불타는 애국심과 정열적인 교육열을 함께 지닌,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다.

미켈란젤리는 2차 대전 중에 공군으로 자원 입대한다.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그는 군대에 가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스스로 입대하여 공군 조종사로 활약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조종하던 전투기가 격추되어 포로 수용소에 잡혀 8개월간 잡혀 살기도 했다.
포로수용소에서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한 미켈란젤리는 그 후 나치즘, 파시즘을 반대하는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리는 호로비츠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연주가 맘에 들지 않으면 맘대로 연주회를 취소하기도 했고 전용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녔는데 호로비츠와 비슷한 점이 또 있다. 무려 10여 년에 걸친 공백이 그것이다. 그는 한 몸에 지닌 재주가 너무 많았던 사람이라 여기저기 다른 공부에 빠져 살 때도 많았는데 2차 대전의 종전 후 다시 연주활동을 재개하여 영국, 미국 등지에서 실력을 뽐내며 최고의 연주자로 평가를 받아가던 그 시점에 갑작스레 잠적, 연주를 중단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10여 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복귀한 미켈란젤리. 이때부터 그는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1968년, 그 괴팍하고 불 같은 성격의 미켈란젤리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켈란젤리의 전속계약사인 BDM 레코드 회사가 파산하면서 법원은 미켈란젤리의 분신 같은 피아노 두 대를 압류했고 그의 재산 9억 리라와 집을 모조리 앗아간 것이다. 단단히 심기가 뒤틀린 미켈란젤리는 크게 실망한다. 조국을 위해 공군조종사로 자원 입대했고 지옥 같은 포로수용소에서 8개월을 살았던 미켈란젤리에게 있어서 조국의 이와 같은 행동은 크나큰 배신, 그 자체였다. 이에 미켈란젤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위스로 망명을 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신의 연주회에 절대로 입장할 수 없도록 하였고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몰래 표를 팔았다가 들키면 곧바로 연주회를 취소해 버렸다.

미켈란젤리에게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교육자로서의 열성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서부터 후학을 양성하는데 큰 재미와 열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볼로냐의 마르티니 콘서바토리의 교수부터 시작하여 평생 동안 수많은 마스터 클래스, 아카데미를 개설하여 후학을 양성하는데 노력했다. 그리고 진정 재능이 보이는 제자라면 그 제자를 위해 무료로 강습해주고 생활에 필요한 전액을 지원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제자를 가르치는 부분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대단히 까탈스런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유명한 마르타 아르헤리치에 대한 일화가 그것이다. 아르헤리치가 유명해지자 미켈란젤리는 그녀가 자신의 제자라고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아르헤리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격분, 반박한 것이다. 정작 그녀는 대 피아니스트의 가르침을 받고자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음악에 대해 가르쳐 준 것은 하나도 없고 산책이나 하면서 스파게티 국수 삶는 법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명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이야기 할 땐 언제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우리치오 폴리니 역시 미켈란젤리에게서 배웠던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자신의 음악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항상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사례를 미루어 볼 때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맘에 드는 제자, 재능이 있어 보이는 제자에게만 열과 성을 쏟아 부었고 남들이 아무리 천재라고 칭찬하더라도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너무도 많은 재주를 타고 났고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으며 살았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큰 행복, 만족감을 느끼고 살진 못했다. 피아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대단히 괴롭고 피곤한 일임을 항상 토로했고 그래서 그는 연주회장에서 청중들을 향해 정중히 인사만 할 뿐 웃는 법이 없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전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청중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쇼맨십 따위는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했다. 청중들을 위해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작곡가를 위해서 연주하는 것이라고.

생의 마지막 유언마저도 그다운 삶의 연장선이었다. 1995년, 스위스의 루가노 근교에서 지병인 심장마비로 숨진 그의 유언은 묘비도 필요 없고 무덤에 십자가 하나만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사망시간도 발표하지 말고 병명도 밝히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조용히 가고 싶다고 했다. 한 세상을 풍미하며 너무도 많은 재주를 발휘한 대 피아니스트. 무결점의 완벽함만을 추구했기에 무척이나 괴팍스럽고 까다롭다는 악평을 들어야만 했던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하지만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 뜨거운 심장을 가졌고 마지막 가는 그 순간엔 공수래 공수거의 이치를 실천한 참으로 멋있는 삶을 살다간 인물이었다.


글쓴이 :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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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2. 그가 남긴 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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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리의 음악-무결점의 피아노

미켈란젤리의 연주를 들으며 내기를 한다. 과연 그의 연주에서 몇 개의 미스터치가 나오는지. 하지만 그의 연주를 듣고 나면 그저 맥이 풀리게 된다. 단 하나의 미스터치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켈란젤리의 연주는 완벽, 무결점, 100% 순수함, 그 자체였다. 이는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미켈란젤리의 연주의 특징은 대단히 깨끗하고 영롱한, 그와 동시에 신비스러움을 갖춘 음색에 있다. 때론 강렬하지만 때론 극도로 섬세한 그의 연주는 대단히 아름답다. 이는 그가 피아노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한 대의 피아노를 죄다 분해한 다음 다시 완벽하게 조립할 줄 아는 흔치 않은 능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였다.



세르쥬 첼리비다케가 이야기하는 미켈란젤리. 첼리비다케는 대표적인 독설가였지만 미켈란젤리에 대해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첼리비다케와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을 연주하고 있는 미켈란젤리. 두 사람 모두 다재다능한 천재였으며 알아주는 딸깍발이들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들은 서로를 무척 존경했다.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대단한 명성에 비해 적은 양의 레코딩만을 남겼고 그 레코딩의 상당수는 연주실황 녹음이었다. 그는 레코딩을 좋아하지 않았고 한창 활동할 때 가졌던 공백기간 또한 길었기 때문이다. 레코딩 수가 적기 때문에 그의 연주 레퍼토리가 협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건 결코 아니다.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리스트, 드뷔시, 라벨 등등 전 시대를 걸쳐 다양한 작곡가의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다. 결코 많은 양의 음반은 아니지만 이처럼 폭넓은 작곡가의 곡을 레코딩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은 그가 남긴 많지 않은 음반들은 하나같이 완벽함, 무결점을 99.9%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음반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해석을 보여주는 명반들로 평가 받고 있다.


미켈란젤리의 명연, 명음반

우선 그가 무척 사랑했던 레퍼토리 중의 하나인 베토벤, 그 중에서도 협주곡 5번 ‘황제’를 살펴본다. 미켈란젤리는 ‘황제’에 많은 애착을 갖고 여러 번에 걸친 녹음을 했는데 동시대를 살았던 그 어떤 연주자에 비해서도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시모 프레시아와 협연한 60년대 음반과 첼리비다케와 함께 한 75년 음반도 있지만 가장 유명한 음반은 79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빈 심포니와 함께 한 79년 음반이다.




‘황제’ 한 곡만이 수록된 음반이라 돈 아깝지 않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돈이 아깝지 않다. 미켈란젤리의 영롱하고 빠른 터치는 압권이고 줄리니의 유연한 반주가 잘 어우러져있다.

이 음반에서 들려주는 미켈란젤리와 줄리니의 ‘황제’는 기존의 음반에 비해 상당히 다른 차원의 해석을 들려주고 있는데 강인하고 경쾌함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유려하면서도 깨끗한 음색의 ‘황제’를 들려주고 있다.

미켈란젤리의 쇼팽도 유명하지만 미켈란젤리 특유의 섬세함, 완벽함, 순도 100%를 여실히 들려주는 연주라면 뭐니뭐니해도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와 라벨의 곡들이 꼽힌다. 특히 그가 남긴 드뷔시의 전주곡, 영상 1&2(image 1&2)이 수록된 음반은 이 곡이 표현하고자 하는 신비스러운 색채를 한 대의 피아노로 가장 잘 표현한 명반 중의 명반으로 단연 손꼽힌다.



드뷔시의 영상(Image) 중 물의 반영(Reflets dans l'eau)

라벨의 그 어렵다는 피아노 곡인 ‘밤의 가스파르’를 가장 잘 연주했던 인물도 바로 미켈란젤리였다. 4종류의 꽤 많은 녹음이 있다. 그 중 어떤 것을 택해도 완벽함, 그 자체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겠으나 음질면으로 봤을 땐 1959년에 남긴 스튜디오 음반이 가장 낫다고 볼 수 있겠다.



'밤의 가스파르'의 수많은 음반 중 만장일치의 극찬을 받는 미켈란젤리의 음반이다.


'밤의 가스파르' 뿐만 아니라 라벨의 피아노 곡 중 또 하나의 중요한 곡인 피아노 협주곡에 있어서도 미켈란젤리의 음반은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특히 2악장에서 표현하는 이 곡 트유의 아름다움은 미켈란젤리를 따라갈 자가 없다는 평이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4번이 함께 수록된 음반. 결정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명반이다.



미켈란젤리의 얼굴을 사진으로 보면 대단히 근엄하고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렇게 근엄하고, 그렇게 차갑게만 보이기만 하는 그의 얼굴. 하지만 그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그 영롱하고 깨끗한 터치와 음색에 놀라고 또 놀라게 된다. 어찌하여 저런 무서운 표정의 얼굴에서 이처럼 순수하기만 한 연주가 나올 수 있는 걸까. 이는 이렇게 바꿔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겉모습은 그토록 차갑게만 느껴졌고 평소에 잘 웃지도 않는 매마른 감정의 소유자처럼 보였지만 그의 내면엔 세상 그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고. 그 뜨거운 심장은 음악을 통해서, 조국을 향한 애국심을 통해서, 그리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교육열을 통해서 한없이 발산되었다고. 20세기를 살다간 대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글쓴이 :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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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리의 어린시절 (1920~1938) ”

아루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는 1920년 1월 5일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 근처의 작은 마을인 오르치누오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지우제페 베테데티 미켈란젤리는 법관 출신인 엄격한 인물이었지만 피아노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제자를 가르칠 정도로 음악애호가였다. 미켈란젤리는 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어머니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4살 무렵에 폐렴에 걸려 피아노로 방향을 바꾸었다.


미켈란젤리는 4살이 되던 해 브레시아 음악원에서 정기적인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5살이 되던 해 미켈란젤리는 다른 음악원 학생들과 같이 교내 음악대회에 참가하였고 이 때 유명한 일화를 남긴다. 어린 미켈란젤리는 대회에 참가하여 무대에 모습을 나타낸 후 잠시동안 피아노 의자 앞에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무대뒤로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그가 겁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를 다시 무대 위로 올려보냈다. 그러나 어린 미켈란젤리는 잠시 후 다시 무대 뒤로 되돌아왔다. 아무 말 없이 이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중 마침내 누군가 의자의 높이가 어린 미켈란젤리가 올라가기에는 너무 높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안아 의자에 올려주었다. 그때서야 미켈란젤리는 아무 표정없이 조용하고 완벽한 연주를 시작하였다.


이 일화는 그의 외골수적인 기질이 어려서부터 나타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훗 날 에도 미켈란젤리는 그의 연주에 열광하는 청중에게 결코 웃음을 지은 적이 없었고 다만 공손하게 인사할 뿐이였다. 그는 청중의 열광이나 박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연주에만 몰입할 뿐이였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관심은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지 청중의 의도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였다.


다음날 지방신문에 이 일화와 함께 어린 꼬마인 미켈란젤리가 놀라운 연주로 청중의 탄성을 자아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사에서 감정과 음악을 천재적 직관을 통해 청중과 소통하는 그의 음악적 감각이 어려서부터 남달랐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후에 그는 밀라노의 음악원으로 진학해 작곡과 피아노 그리고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는 밀라노에서 1934년 열 네 살의 나이로 피아노 연주의 디플롬을 받고 공식적인 피아니스트의 삶을 시작하였지만 집안의 권유로 대학에서는 5년동안 의학을 전공하였고,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래서 그는 피아니스트이지만 특이하게도 의학을 전공하였고, 때문에 의사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리는 피아노 외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네바 콩쿨을 우승하였던 19살 당시 그는 음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유명한 자동차 경주도 휩쓸었다. 바이올린에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정통하였다. 훗 날 미켈란젤리는 인터뷰에서 그의 피아노 소리는 바이올린에서 찾아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리는 가정용 피아노도 아닌 연주회용 풀 사이즈 그랜드 피아노를 분해했다 다시 조립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피아노의 물리적인 속성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미켈란젤리의 놀라울만큼의 정확하고 치밀한 연주는 피아노의 물리적 속성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병약하였지만 등산과 스키 실력도 일류급이었다. 병약하여 운동을 기피하였던 미켈란젤리였지만, 산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래서 산과 관련된 운동에서만큼은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후에 그는 알프스의 산사람들을 모아 합창을 지휘하며 몇몇 곡들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1938년 6월, 그의 나의 18살 때 미켈란젤리는 벨기에 바이올린니스트 유진 이자이를 기리기 위해서 창설된 벨기에 브뤼셀의 제 2회 이자이 콩쿠르에 참석한다.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이 대회는 처음에는 바이올린니스트들만을 위한 대회였다. 첫 대회 우승자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였고 에밀 길레스는 두 번째 대회부터 신설된 피아노 부분 우승자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미켈란젤리는 관객열광적인 호응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에서 고작 7위에 머물렀다. 그것은 루빈스타인이 미켈란젤리에게 낮은 평점을 주었고, 심지어 이탈리아 심사자들은 그에게 0점을 주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대회를 후원하였던 당시 벨기에의 여왕 엘리자베드 여왕은 미켈란젤리의 화려한 연주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여왕은 따로 그를 불러 궁전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어린 피아니스트의 특별한 재능을 칭찬하였다. 다이아몬드가 달린 7자 모양의 커프스 단추가 미켈란젤리에게 수여되었고 여왕은 7은 그의 행운의 숫자가 될 것 이라고 말하였고 이는 얼마지나지 않아 실현되었다. 후에도 엘리자베드 여왕과 아루투르 베네테티 미켈란젤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의 절친한 사이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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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날의 미켈란젤리, 피아니스트로 ... (1939~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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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아돌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제3회 브루셀 콩쿠르는 개최될 수 없었다. 그러나 중립국이였던 스위스에서는 새로운 국제 콩쿠르가 창설되었다. 이 대회에 참석한 미켈란젤리는 7번째 연주자로 예정되어있었고, 1939년 6월 8일 미켈란젤리는 이 대회에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였다. 여왕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 일까? 심사의원중 한명이였던 알프레드 코프토가 외쳤다. "새로운 리스트가 탄생하였다" 이 간결하고 영광스러운 카피와 함께 미켈란젤리는 콩쿠르의 우승자가 되었다.


코르토는 미켈란젤리에게 그의 사진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사인하였다. "아루투르 베데티 미켈란젤리 당신에게 나의 경의를 표합니다." 이렇게 전설은 시작되었다. 신문들은 앞다투어 열광적인 평가를 내놓았고, 곳곳에서 연주회 요청이 빗발쳤다. 이태리의 메이저 음반사에서는 그에게 레코딩을 제의하였다. 코르토의 논평은 이런한 열광을 가능케 하였고, 평론가들 역시 미켈란젤리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곧 유럽전체가 세계 2차대전의 포연 속으로 휩싸여들었고 이탈리아도 피할 수 없었다. 벨기에 왕족이였던 이탈리아의 여왕이 미켈란젤리를 병역의무를 전쟁으로부터 면제시켜주기위하여 중재에 나섰지만, 미켈란젤리는 그 민감한 시기에도 조국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켈란젤리는 조국을 위하여 군에 지원하였다. 그가 전쟁중에 지원한 병과는 놀랍게도 공군조종사였다. 전쟁중 독일군에게 사로잡혀 포로생활까지 하였지만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였고 뒤에는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활동까지 뛰어들었다. 매우 까다롭고 완벽하게 알려진 미켈란젤리였지만 그도 평범한 사람처럼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2차세계대전중의 미켈란젤리의 경력은 다른 예술가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경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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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음악팬들은 이탈리아의 '제 2의 리스트'를 곧바로 기억해냈다. 1946년 전후 최초로 베를린에서 열린 콘서트, 1948년에 열린 미국에서의 콘서트 그리고 아시아 투어를 통해서 미켈란젤리는 흔들림없는 그의 위치를 구축하였다. 1949년 그는 쇼팽 서거 100주년을 맞아 열린 폴란드의 쇼팽 축제에서 '공식 피아니스트'의 역할을 하였다. 여러 면에서 그의 연주는 전후 찾아온 새로운 '현대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청중들에게 내면의 비경을 열어 보이는 '선지자'로서의 연주가상은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었다. 과장된 루바토나 악보를 깡그리 무시하는 주관적 해석도 더 이상 인정받지 못했다. 특정한 기교를 발달시켜 전반적인 테크닉의 불균형을 덮어버리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했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또렷하고 정갈한 터치, 정확한기교, 악보의 객관적 전달이었다. "내게 갈채가 보내지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갈채는 베토벤이나 쇼팽, 드뷔시에게 보내져야 한다" 고 말하곤 했던 미켈란젤리는 이런 전후세대의 요구를 앞장서 선도해갔다.


그가 자기 직업을 대하는 태도는 열정이라기보다 일종의 의무감에 가까웠다. 그는 매일 열 시간씩 연습을 빼놓지 않았다. 병약한 체질이었던지라 오랜 연습이 근육통과 관절의 통증을 동반했지만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그의 콘서트는 종교적 체험에 가까웠다. 무대뒤에서 빠져나오듯 걸어나와 소리도 내지 않고 피아노 앞에 섰다. 인사는 절제되어 엄숙하기까지 했다. 청중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절제된 동작으로 먹이를 낚아채는 맹수처럼 건반을 잡아챘다. 피아니시모에서는 핀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잦은 이주 속에서도 알프스의 산들이 보이는 곳에만 거처를 정했으며, 연주여행 때문에 며칠 동안 눈쌓인 산을 보지 못하면 불안해하였다던 미켈란젤리. 그의 연주 또한 눈쌓인 산을 닮았다. 또렷하고 정갈한 터치, 차가움이 느껴질 정도의 정밀한 기교, 오케스트라를 맞먹는 포르티시모까지 포용하는 웅장한 스케일이 그의 연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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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리는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종 피아노 연주는 고된 노동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피아노 연주가 팔과 어깨에 많은 통증과 무리를 유발하고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일종의 육체적 노동이였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리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악기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하루에 10시간 가량의 연습을 게을리 한적이 없었다. 그는 작품에 임할 때 우선 기교적으로 완벽해질 때까지 연습하고 난 후에야 비로서 작품의 해석에 골몰하였다. 그는 마지막 리허설이 있기 2일전부터는 연습을 중단하였다. 그것은 기계적인 연습에 의해서 베인 습관이 몸과 마음에 스며든체 무대에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미켈란젤리의 극도로 세심한 터치는 피아노 색채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 나갔고 몇몇 선각자적인 피아니스트들(리히터, 굴드등...)과 함께 미켈란젤리는 피아노 연주의 기교적, 음향적 한계를 향해 끓임없이 나아갔다. 그것은 정밀함, 우아함 그리고 힘을 겸비한 실현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노 예술가의 정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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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중반에서... 교육과 사생활 (1960,7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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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리는 교육에 대단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열 한살 때부터 스스로 '모범적' 이라고 생각하는 연주방식을 시범해 보이는 방법으로 성인 연주가를 지도하곤 하였다. 첫 공식 교수직은 1938년 볼로냐 음악원이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베니스로 옮겼고 건강상의 이유로 이탈리아령 남티롤의 볼차노로 옮긴 그는 1959년까지 그곳에서 재임했다. 60년대 이후부터는 토리노와 루가노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다. 그의 제자들중 마우리치오 폴리니,마르타 아르헤리치,아담 하라세비치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폴리니는 그의 인터뷰에서 미켈란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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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20세기 최대의 피아니스트이며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연주자입니다.”


  "그를 접한 것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1961년에 몇 번인가 레슨을 받은 게 전부지만 그것이 내가 음악가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요. 나를 가르쳐 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리는 여러 작품을 연주했지만 특히 그의 라벨, 리스트, 슈만, 그리고 스카를라티의 아름다움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지요. 해석도 뛰어나지만 소리의 섬세함과 음색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완벽 그 자체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아마도 칸텔리, 미켈란젤리, 아바도, 아카르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이탈리아계 연주자들은 공통적으로 완벽한 기교와 투명한 음색을 선호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엄격하게 말하면 어떤 하나의 악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다만 미켈란젤리와 함께 공부를 한 나로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교수법은 엄밀하거나 세세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모든 피아니스트는 각각 다른 육체적 조건을 갖고 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은 더욱 다르다. 그러므로 근육의 훈련은 제각기 맞는 방법으로 해야지 강요할 수 없다. 보편적이고 특별한 테크닉 연마법이란 없다." 고 말했다. 테크닉 뿐만 아니라 해석에서도 그랬다. "나는 내 무늬로 학생들이 태피스트리를 짜게 하고 싶지 않다. 복사판(카본 카피)을 만든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때론 그의 가르침은 추상적인 설교를 연상시켰다. "음색에 대해 생각할때는 피아노가 아닌 다른 악기를 상상하는 것이 좋다. 내 경우에는 바이올린과 오르간 소리가 섞인 소리 같다고 할 수 있다. 페달은 호흡을 지탱해주는 나의 폐와 같다" 라는 등.


그러나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가 열정적이고 주의깊으며 잘 준비된 교사라고 회상했다. 그는 연주회를 통해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제자들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60여명의 제자들에게는 경제적 후원까지 뒷받침하였다. 그의 레슨과 강좌는 언제나 무료였다. 음악은 그것을 누릴 가치가있는 사람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 것이 그의 원칙이였기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리는 1943년 9월 20일 어린 시절 브레시아 음악원에서 만난 그의 제자 줄리아나 귀데띠와 결혼을 하였다. 그녀 역시 조용한 삶을 살았으며 남편과 같이 공개 석상에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결혼 것조차 모르는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그를 독신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의 아내는 그의 조언자이자 연주회와 일시를 계획하는 매니저였고 그외 경제적인 일들까지 맡아보았다. 그녀는 남편의 좋은 상담자이자 비서였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그의 콘서트가 많은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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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이나 행동 그리고 분위기에서 미켈란젤리는 야행성으로 분류된다. 사실 그는 밤 늦게까지 명상을 하거나 연주를 하곤하였다. 그러다 새벽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고 오후 2시경이 되어서야 연주와 레슨을 시작하였다. 미켈란젤리는 늘 좋지 못한 건강 때문에 시달렸고, 오랜 세월 오른쪽 팔의 통증으로 고생하였다. 애연가였던 그의 습관 때문에 폐도 많이 좋지않았다. 그는 그가 입는 옷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여름과 겨울에 입을 2벌의 옷만 소유하였다고 한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에게 미켈란젤리는 훌룡한 경청자였고 그의 취향에 맞지 않는 해석을 가진 연주자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코르토부터 판데레스키까지 훌룡한 동시대 연주들의 연주를 접할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다양한 20세기 피아니즘과 변천과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미켈란젤리가 평소 특별히 높게 평가한 음악가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와 귀도 칸텔리였다.


미켈란젤리는 결코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역시 그보다 더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사생활의 보호를 위하여 심지어는 그들이 결혼한 사실까지 무시하고는 하였다. 인터뷰를 거듭 피하다가 결국 수락해야 할 경우 미켈란젤리는 툭하면 거짓말을 하거나 꼭 말해야 할 사실을 빼놓곤 했다. 그는 그의 선생님들이 독일인이거나 오스크리아인이였고, 그의 할머니는 그를 데리고 유럽을 여행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 부친이 '베네딕트파'에 속하는 오스트리아 학자 집안이고 모친은 슬라브계라고 얘기하곤 하였지만 근거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할머니는 그를 데리고 자주 여행을 다녔으며 그의 기질은 분명 이탈리아 사람의 보편적인 기질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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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기의 삶과 유명한 그의 일화 (~ 1995) ”

미켈란젤리가 자신의 피아노를 전세계로 가지고 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피아노는 진동이나 기온변화를 겪은 뒤 세심하게 튜닝해야 하고 메커니즘이 손상되기 쉬운데다 운송료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미친 짓'을 하는 연주가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리의 스타인웨이는 그가 가는 곳마다 트럭이나 비행기에 두꺼운 천으로 둘려싸여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또한 그의 전속 조율사를 항상 동행시켰다. 어쩌다 피아노를 가져가지 못할 경우에는 악기선택에 매우 까다운 주문을 하였다. 한번은 그가 일본에서의 예정된 첫날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었다. 그의 피아노가 일본까지의 긴 여정으로 상태가 좋지않았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일본사람은 그의 여권을 압류하고 그에게 상당한 수준의 위약금을 부과하는 등 감정적인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미켈란젤리는 그 뒤 일본에서 연주회는 물론 일본도 절대 방문하지 않았다.


그의 연주회 취소 이력은 분명 악명높았다. 100%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연주를 취소했다. 병약했기 때문이게도 했지만, 그는 좋은 피아노, 쾌적한 날씨, 좋은 음향이 다 갖춰져야 만족했다. 녹음에 있어서도 그랬다. 그의 화려한 연주여행에 비해 레코딩은 분명 적은 편이다. 첼리비다케처럼 레코딩에 태생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실제 이유는 그가 완전히 '세팅'에만족해야만 녹음에 응했기 때문이었다. 녹음 과정에는 꼭 필요한 실무자만 입회해야 했으며,레코드사 고위관계자까지도 녹음실 근처에 얼쩡거릴 수 없었다. 그러나 녹음 자체는 한 두 번 연주로 쉽게 끝났다. 녹음된 연주를 체크해보긴 했지만 편집과정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1968년, 미켈란젤리의 음반작업 파트너였고 그가 투자를 하기도 했던 BDM사가 파산을 맞았다. 이탈리아 당국은 그의 피아노 두 대를 압류했다. 자신의 공식적인 거주지를 조국 이탈리아에서 한번도 바꿔본적이 없었지만 격노한 미켈란젤리는 조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조국을 위하여 예술가의 지위를 버리고 목숨을 걸고 전쟁까지 참전한 미켈란젤리에게 자신의 분신인 피아노를 빼앗긴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였다. 처음에는 취리히에, 그 뒤 1970년 이후에는 역시 스위스 내인 티치노에, 1979년에는 폰테 트레사 근처의 작은 마을에 정주했다. 그의 집은 이웃과는 고립되어 있었고, 이웃과의 교류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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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고독한 삶이였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의 개인적 면모는 '기인'에 가까웠다고 얘기된다. 그러나 그의 기벽스러움은 예를 들어 글렌 굴드의 그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굴드가 피아노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일종의 '철부지 소년'의 모습으로 비쳤다면 미켈란젤리의 경우 자기와 주변에 요구하는 완벽성이 너무 지나쳐 까탈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조국을 위해 참전까지 했던 그가 이탈리아에 보인 격노는 대단했다. 그가 이탈리아로 향할 때는 단지 '이탈리아 내의 외국'인 바티칸에 가거나 다른 곳 일지라도 교황 임석하의 콘서트를 갖기 위해서였다. 이름에 '축복'(Benedict)과 '천사 미카엘'(Michelangelo)를 담고 있던 그는 60년대초 재임한 교황 요한 23세의 동향 친구이기도 했고 젊은 시절 수도원에 1년간이나 생황한 적도 있었다. 요한 23세 사후에도 그와 교황청의 긴밀한 관계는 한결같았다. 1993년에는 미켈란젤리가 런던 타임즈에 사비를 들여 그의 런던에서의 예정된 4번의 모든 연주회를 취소하는 광고를 싣었다. 주최측이 이탈리아인 80여명에게 입장권을 팔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결국 런던에서의 콘서트는 1990년에 열린 것이 마지막으로 기록되었다.


1988년 10월 17일 보르도의 대극장 무대위에서 드부시의 전주곡 2집중 Ondine을 연주하던 도중 심장발작을 일으켜 목숨을 잃을 뻔 하였다. 연주도중 조금 일어서서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더니 무대 뒤로 향해 가서는 부인의 품에서 쓰러졌고, 홀에 있던 심장 전문의들이 달려와 긴급처치를 통하여 간신히 그를 살려내었다. 그러나 그를 곧 회복되어 만년까지 왕성하게 콘서트 활동을 펼쳤다. 그의 마지막 연주회 1993년 5월 함부르크 무지크할레에서 열린 드뷔시 콘서트였다.


미켈란젤리는 95년 6월 12일 루가노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그의 유언에 따라 병명도, 사망시간도 발표되지 않았다. 인근의 작은 공원묘지에 그는 묻혔고 비문이나 비석은 없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죽음치고는 간소하였지만, 미켈란젤리가 평생을 살아온 삶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검소하고 고독하게 살았던 미켈란젤리였다. 신화와 같았던 거장의 죽음을 두고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폴리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에서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나의 슬픔은 극심합니다. 그의 예술에 대한 기억은 절대적인 방법으로 예술적인 이상에 헌신한 한 인간의 전형에 대한 기억과 함께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새겨질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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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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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럭비공같이 튀는 삶에 대하여.......

그는 과연 일상생활에서 그냥 살고 있는 천재였엇는가 아니면 음악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자신만의 장벽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는가...?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따라 다르게 보이겠지만 아마도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그는 음악에 한하여는 장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삶을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말하는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그가 연주하는 것에 있다. 그가 연주하는 음 하나하나가 바로 그가 말하려는 것이다.


 그의 튀었던 경력.......


피아니스트이면서도, 오르가니스트였고,항공기 파일럿에다가 카레이서였다.
그의 경력에서는 밀레 밀리아라는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한 경력도 있다고 한다. 스키의 명수였으며 의사이기도 하였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그는 의술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한때는 알프스의 산사나이들을 모아서 합창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가 공연 연주가들에게 불리는 말은 '일급 요주의 인물' 이라는 것이었다. 공연 직전이나
 레코딩 중간에 취소시켜 버린 일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연 취소 이유는 여러가지 이다. 건강상의 문제이서부터 악기문제, 조율문제, 홀의 음향문제, 그리고 청중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다.

연주회 당일에는 하루종일 극장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소리를 점검 하였으며, 음이 완전히 조울되었다고 느껴지기 전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베를린 연주회에서는 이 기다림을 두 시간 동안이나 끈 적도 있었다. 그나마도 연주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다행인 것이었다. 파리에서는 손이 시렵다고 연주를 거부했고, 브레겐츠에서는 청중이 세 번이나 기침을 했다는 이유로 앙코르를 거부했다. 취리히에서는 에어콘이 켜져있다는 이유로 연주를 거부했다.

이로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지만 그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위하여 연주를 하지 않는다. 오직 나와 작곡가를 위해서 할 뿐이다. 그 자리에 청중이 있건 없건 상관 없다."

교육도 제멋대로 였다. 어떤 날은 블과 10 분, 어떤 날은 4 시간을 끌기도 했다. 엄청난 고액의 수업료를 요구하기도 하였고 마음에 들면,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나 가난한 사람들은 몇 년을 무료로 가르치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리가 갇는 위험의 이유에 대하여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성격을 거론한다.
즉 , 미켈란젤리는 오늘날에는 거의 드문 이상주의자이며 완벽주의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거나 자기 뜻이 아닌 ;불순물' 이 섞인다면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타협하려면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음악은 그만큼 엄격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음악에 대한 지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는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하였다.
줄리니 마저도 미켈란젤리를 마리아 칼라스와 함꼐 예술과 삶 사이에 장벽이 있었던 두 사람의 예술라고 꼽은 바 있다. 그는 대두분 검은 옷을 입고 다녔다. 그 검은 옷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과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연주할 때 외에는 대중에게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랬기에 그의 삶은 매일이 가려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매력은 자꾸만 커져갔다.


그에대한 음악에 대한 평은 '피아노를 들고 다닌 피아니스트' 라는 것이엇다.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연주는 용납하지 못하였따. 그래서 그런 것일까...? 환갑이 넘은 뒤인 80년대부터는 아예 자기 자기 마음에 맞는 음색의 피아노를 지참하고 연주여행을 다녔다.

20세기의 명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그는 명성에 비하면 남긴 음반의 수는 적은 편이다. 음반계에서는 연주뿐만 아니라 녹음에도 까다로왔던 미켈란젤리 특유의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미켈란젤리의 연주는 '맑은 물의 흐름처럼 투명하고 막힘이 없다.'는 평을 얻는다. 음 하나하나를 높치지 않는 정확하고 가벼운 터치, 피아니시모부터 포르티시모까지의 음색 표현하는데 있어서 감정의 과잉이 없는 절제, 그러면서도 규격화 되지 않고 작곡가가 의도하였던 선율의아름다움을 충분히 노래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투명한 음색만큼이나 미켈란젤리의 음악활동도 지극히 절제되엇다.


미켈란젤리는 명성을 얻은 음악가들이 흔히 1 년에 100 회 이상의 연주회를 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연주회 횟수를 1년에 40 회로 제한했다. 그의 음악의 생명력은 이런 절제에서 나오는 감정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약간은 뜬 구름같은 이상적인 사고를 하는연주 그리고 눅눅한 고뇌보다는 맑은 연주를 추구하는 것이 그의 음악 철학의 기조를 이루고 있어서인지 깊은 격정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아쉬운 점으로 남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3편으로 겨우 나눠서 이 졸타를 읽어 주신분들에게 권하는 음반입니다.....


 포니트 세트라 :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1 2 집.......

 도이치 그라모폰 : 쇼팽 리사이틀 앨범 , 드뷔시의 프렐류드 1 2 집
       
                   드뷔시 영상 1 2 집 과 어린이의 차지

 피아노 라이브러리  : 젊은 미켈란젤의 연주를 녹음하였던 것입니다. (이 앨범은 20 세기 초반에 연주하였던 그의 연주색을 감상 할 수 있는 기회와 그가 바로크 음악에서부터 기조하였다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이 앨범에는 바로크를 주로 하고 낭만파 곡이 소수 잇는 음반입니다. )


참 자료를 읽다보니 미켈란젤리가 연주한 스카를라티 음반도 있더군요...

그리고 음반시장에서 둘러본 바로는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연주한 미켈란젤리도 있구요.
참 지난번에 들어보니 도이치에서 황제 음반도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개인적으로는 미켈란젤리를 지성적인 미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완전히 뒤로 넘긴 앞머리에다가 콧수염 그리고 날카로운 눈에다가 단정한 머리 까지 아주 냉정하고 지적인 신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이를 먹으니 아주 히스테리컬한 할아버지도 변하는군요......--


여담이었습니다. 그러면 전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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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단디24]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3
올린이 : fredsak (오종철  )    97/08/31 11:02    읽음 :  22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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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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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537 에서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던 화음변화의 단절과 다이내미즘의 절제의 문제점들이 나타나곤 한다. 그의 해석은 빌헬름 켐프에 못지 않게 아름답고 순수한 전원을 그려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전원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아름답되 건조한 전원, 인간과 사귀지못한 미켈란젤리의 특징이 음악에 투영되는 것 같다.


미켈란젤리가 연주하는 쇼팽의 음반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은 약간씩은 나타난다. 쇼팽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성격은 부각시키지만 내재되어 있는 쇼팽의 정열이나 아픈 정서의 흔들림은 잘 나타내지 못한다. 쇼팽에 대하여 경건한 느낌이 들 정도이기도 한다.


그가 쇼팽을 연주하는 과정에서 중시하는 과정은 음에대한 철학일 것이다. 이런 과정은 비단 다른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과정에서도 중시하겠지만 쇼팽의 곡에서는 두드러진다. 곡이 본래 의도하는 것에는 크게는 충실하지는 않지만 그가 살리는 쇼팽은 약간은 다른면모 - 사실적이고 안정되어있는 면 - 를 나타낸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리가 연주하는 발라드 제 1 번에서는 이런 면과는 약간 다른 연주색을 들려준다. 이 곡에서는 감정의 차이가 극명한 면이 드러나면서 음 개개의 색이 크게 드러난다. 그는 쇼팽을 연주하면서 곡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 경우가 있다. 그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연주하였던 이별의 왈츠를 들어보면 이런 면을 알 수 있다. 이별의 왈츠의 성격은 쇼팽 자신이 이별에 대하여 역설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곡이라고한다.


미켈란젤리의 이 왈츠는 왠지 모르게 기쁜면이 드러난다. 우중충하게 애수적인 면도 드러나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곡 분위기를 기쁘게 이끌어 가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그의 어쩔줄 모르면서 사는 생활이 드러나고는 한다. 전번적으로 드러나는 쇼팽연주색은 자유분방성을 중시하되 속도 면에서는 왜 인지 둔하다는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낭만주의 영역에서 쇼팽의 연주 색이 분분한 느낌을 준다면 슈만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좋은 평을 받는다고 한다. 빠른 속도 설정과 강한 표현으로 피아니시모와 메조 포르테를 오가는 축제를 벌이는 연주를 하게 된다. '팡파레' 지의 레이몬드 터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난 미켈란젤리 숭배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연주가 훌륭하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가진 절제와 자유의 그 좁은 틈을 노니는 견고함과 친절함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연주자다."


리스트의 음악에서는 왠지 모르게 순수한 테크닉이 아닌 과학적인 탐구를 적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완벽한 비르투오시티와 장인 정신으로 음을 세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리스트 음악의 특징은 넓은 스케일과 불규칙적인 리듬 , 분절된 악절, 현란한 중음 트릴과 아르페지오등인데.....

미켈란젤리에게 있어서 이런 것들을 처리하는 능력은 확실하다. 미켈란젤리의 명반 중에서는 또 꼽을 것이 있다면 드뷔시의 피아노곡 앨범일 것이다. 프렐류드 1,2 집은 1978년과 1988년 10년의 사이를 두고 제작되엇다고 하는데 여기서 그의 완벽주의를 읽을 수 있다.

이런 긴 세월이 걸린 만큼 실제로 음 하나하나가 철저히 연마되어 있으며 신비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그리고 점묘적인 묘사는 음과 여백사이에 감추어진 신비를 차분하게 드러낸다. '어린이 차지' 에서는 페달터치가 놀랍게 드러난다. 전주곡에서 드러나는 그의 연주색은 괴팍한 면모를 드러낸다. 연주가 기분대로 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음악에 대한 다양한 변신을 그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항상 그의 표정에서는 무엇인가에 대한 불만을 읽을 수 잇는데 음 하나하나에서는 항상 기꺼이 연주를 하는 모습이 연주속에 들어있다. 평론가들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바로크에서 시작한 그의 음악색은 이제 인상주의까지 발을 들여 놓았고 한 획까지 그은 연주를 하였다.

화려한 음색은 아니지만 통일된 음조 속에서 미묘한 조화나 뉘앙스를 추구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피아니시모는 다른 예술가들보다는 최소한 세 배나 구분되어 들린다. 아티큘레이션에서도 구별된다. 평론가들은 이 미켈란젤리는 현존하는 피아니스트중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우며 독창적인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피아노의 투명성과 정확성에서는 앞섰지만 왠지 모르게 탄식하거나 열광하는 인간미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인간이 아니라 하늘을 쳐다보고 산 수도승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다.


미켈란젤리를 바라보는 눈은 그에게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상당히 다르다. 이런 사례는 미켈란젤리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것을 밝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미켈란젤리의 제자라고 한다. 그녀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그녀는 미켈란젤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음악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맛있는 스파케티를 위한 국수 삶는 법, 산책하는 방법, 그의 문학과 역사에 관한 것 등이 음악레슨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는 이렇게 말한다. "연주생활 중에 그와 함꼐 식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화제는 항상 예술에만 머물러 있엇다... 그의 삶은 교요햇지만 그의 예술은 마술과도 같았다."

이런 상반된 평가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미켈란젤리 자신에게서만 나온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한 구분이 너무나 명확햇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아르헤리치를 별로 신통찮은 연주가라고 말한 바 있다.

미켈란젤리는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다. 자신이 처해잇는 운명이 전혀 음악과는 무관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의 삶은 음악과 소원하여 있을 경우에도 항상 음악이었다. 그리고 외로운 생활을 하였지만 왠지는 모르게 그에게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은 상당히 심도 있엇지만 사람들을 대하는 점에서는 기분내키는 정도라고 하였는데........

그의 생활을 살펴보면 그의 음악 철학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3 번째 글에서는 그의 생활과 연관된 음악 철학과 그의 연주가 수록된 음반에 대하여 쓸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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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제목 : [단디24]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2
올린이 : fredsak (오종철  )    97/08/25 11:17    
출처 : 출처 :
http://cafe.naver.com/gos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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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라베츠의 쇼팽 녹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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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반 모라베츠이라는 이름의 피아니스트가 있다. 서양 고전음악계에서는 비교적 변방인 체코 출신의 숨겨진 피아니스트이다. 지명도는 낮지만 실력은 지명도와는 반비례로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중의 한명이다. 그는 50년대부터 세인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차곡차곡 자신만의 음악적 경력을 쌓아왔으며 흙 속의 진주와 같은 음악을 음반을 통해서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그는 위대한 마에스트로 미켈란젤리의 제자였고, 스승처럼 수정처럼 빛나고 절제된 톤으로 그만의 리리시즘을 완성하여왔다.


악독 레이블인 워너에서 몇 년전부터 수입되기 시작한 울티마 시리즈로 그의 가장 빛나는 명반중의 명반인 쇼팽녹턴이 수입되기 전까지 나는 그가 누구인지조자 몰랐었다. 그가 연주한 쇼팽 녹턴을 구입하기 전까지 이 이름도 없는 피아니스트의 음반을 사야되나 말아야 되나 참 많이도 망설였던 것 같다.


우여곡절끝에 구입한 음반을 손에 쥐고 시디플레이어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을 때, 그간의 모든 나의 의구심과 불안감은 첫곡 Nocturne op.9-1 과 함께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의 연주는 불신으로 가득한 언 땅과 같은 내 마음을 녹이는 봄바람 같은 연주였다. 그는 봄을 부르는 봄바람과 같은 연주자였다. 쇼팽 녹턴에 대한 겨울과 같이 완고한 나의 교만과 권태는 사라졌다.


모라베츠의 음색은 잘 정제되어있고 투명하다 때문에 여러면에서 미켈란젤리와 유사하지만
모라베츠의 음악에는 쇼팽이 가졌음직할 병적인 섬세함이 있다. 녹턴 연주에서도 모라베츠는 악보에만 구애받지 않고 숨겨진 쇼팽의 정서를 읽어내고있다.


예측이 불가능한 자유로운 루바토, 셈세하게 빛나는 아티큘레이션 그리고 그만이 가지고 있는 소노리티. 모라베츠의 연주는 프랑소와의 병적인 환상, 루빈스타인의 절제된 미덕과도 그 괘가 다른 연주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프랑소와 연주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안개 자욱한 여름 밤이 프랑소와의 연주라면 모라베츠의 연주는 투명한 한여름 밤을 보여준다. 덥지않은 여름 밤 맑은 밤공기를 타고 은은한 달빛이 내 핏줄을 타고 흐른다. 모라베츠의 연주는 몽환적인 한 여름 밤에 남극의 투명한 겨울바다를 연상시킨다.


녹턴과 같이 잘 알려져있고 많은 연주자들이 도전한 곡을 매너리즘에 젖지 않고 연주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나만해도 수많은 녹턴 연주를 갖고 있고 들어보았지만 마음이 가는 연주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이다. 악보의 음표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연주는 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쉬운만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주하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지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라베츠의 연주는 프랑소와처럼 개성적이면서도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어떤 연주보다 아름다웠다. 섬세하다 못해 만지면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그의 지극히 투명한 음색은 다시 살아난 미켈란젤리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모라베츠의 연주의 가장 큰 미덕은 음악의 본질을 나에게 일깨워주었다는 것이다
.
베토벤이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지켜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 것처럼 모라베츠는 음악의 본질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나에게 각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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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의 미켈란젤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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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생을 마친 스위스인 것 같다.
세라핀 지휘의 오페라 판을 들고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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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루피 소나타 ”

나에게 피아노를 선사해준 그는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이다.

KBS클래식 채녈에서 그의 갈루피 소나타를 듣는 순간 피아노가 가진 최고의 매력을 알아버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처럼 맺혀있는 이슬의 영롱함 그 영롱한 음색이 그의 손끝을 거치자 조심스런 슬픔이 되어 나의 마음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와 내 맘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리의 피아노는 너무나 아름다워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여인의 도도함을 닮았다.
선율속에 조화롭게 녹아내리지 않고 한 음 한 음 튕겨져나와 화사하게 반짝이며 멜로디를 다시 그려낸다.
협주곡 속에서도 그의 피아노는 도드라진다. 오케스트라에 융합되어 이끌리지 않고 오케스트라와 경쟁하듯 밀고 당기는 팽팽한 긴장감이 박진감 넘치는 전개를 만들어낸다.
꼬장꼬장함에 늘 완벽함을 추구하는 그의 쉽지 않은 성격이 그가 마주하는 피아노에서 그대로 투영되어 나온다.

어둠이 삼켜버린 세상속에서 홀로 차가운 빛을 품어내며 자신이 비추고 싶은 곳에만 빛을 내어주는 달과 같이 그는 그의 피아노 속에서 홀로 외로이 그리고 당당하게 빛나고 있다.


                                                                  -  고클래식 zerosumy 께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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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승림의무대X파일 -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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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는 커다란 덩치에 비해 워낙 섬세한 악기인지라 진동이며 기온 변화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것 이상으로 손상되기 쉽다. 따라서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피아니스트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20세기에는 피아노를 직접 공수해가지고 다닌 거장들도 간혹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있다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고유한 음색으로도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다. 하지만 그 음색이란 것이 아무 피아노에서나 살아날 수는 없었다. 음량을 인위적으로 다듬고 조율한 그들만의 피아노와 또 그를 따라다닌 전속 조율사의 덕이 크다.


워낙 까다로운 결벽주의자로 유명한 미켈란젤리는 한 가지라도 불만족스러운 조건이 있다면 공연을 취소했다. 날씨, 음향, 그리고 자신의 건강상태가 모두 갖춰져야 무대에 들어섰으며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 여행온 피아노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했다.

한번은 일본에 공연을 갔을 때 피아노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 당연히 미켈란젤리는 공연을 취소했다. 유럽이었다면 미켈란젤리의 이런 튀는 행동이 결코 놀랍지 않았겠지만 일본은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미켈란젤리의 여권을 압류하고 엄청난 위약금을 부과하며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미켈란젤리는 이후 다시는 일본을 방문하지 않았다.


연주회만큼이나 그는 레코딩에서도 까다로운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의 레코딩이 숫적으로 적은 이유는 온전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만 비로소 마이크 앞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음반 때문에 미켈란젤리는 조국 이탈리아를 등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968년 미켈란젤리의 전속 음반사였던 비디엠(BDM)사가 파산하자 이탈리아 당국은 그의 피아노 두 대를 압류했다. 조국을 위해 피아니스트라는 신분을 불사하고 총까지 들고 참전했던 그는 대단히 격노해 결국 스위스로 망명했고, 그 뒤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지 않았다. 심지어는 주최 쪽이 이탈리아인에게 티켓을 팔았다는 이유로 런던 콘서트를 취소할 만큼 그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이탈리아령이 아닌 바티칸에서는 꾸준히 콘서트를 열며 애정을 표시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23세는 미켈란젤리의 동향 친구였으며 수도원에서 함께 생활한 적이 있는 각별한 사이였다.


1960년 4월28일 저녁에도 그는 바티칸 베네딕트 홀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고 있었다. 2악장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밤하늘에 번개가 번쩍였다. 점점 잦아드는 피아노 소리 위로 그 다음에는 천둥소리가 내려앉았다. 마침 천둥이 내려친 시기는 이 마에스트로가 경쾌한 3악장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자연이 선사한 시기적절한 애들립에 잔뜩 고무된 미켈란젤리는 충만한 영감으로 이날 공연을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이 연주실황은 아무런 편집없이 있는 그대로 녹음되어 1991년 미켈란젤리의 승인 아래 히스토리컬 레코딩으로 발매되었다. 물론 그 장엄한 천둥소리도 함께.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1041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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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투로 베네뎃티-미켈란젤리의 음악세계 ”

아르투로 베네뎃티-미켈란젤리의 음악세계 2

- 글쓴이 : 송진명 (다음카페 옛거장을 기리며...) 01/02 27


미켈란젤리의 녹음들 미켈란젤리는 녹음을 싫어하기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동년배의 연주자들인 리히터나 제르킨, 아라우등에 비해 현저히 적은 녹음을 남기고 있습니다. 레퍼토리 또한 베토벤, 드뷔시, 슈만, 쇼팽, 슈베르트정도로 극히 제한되어있습니다. 일단 제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미켈란젤리의 CD는 다음과 같습니다.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4번 + 피아노 협주곡 1번 (줄리니/ 빈 심포니)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줄리니/ 빈 심포니)
- 브람스 발라드 Op.10 +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537
- 쇼팽 마주르카 10곡 + 전주곡 Op.45 + 발라드 Op.23 + 스케르초 Op.3
- 드뷔시 영상 1,2집 + 어린이 코너 - 드뷔시 전주곡 1집 - 드뷔시 전주곡 2집
- 하이든 피아노 협주곡 4번, 11번 에드몽 드 쉬투츠/ 취리히 실내관현악단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5번,바흐-부조니 샤콘느,브람스 "파가니니주제에 의한 변주곡 " 그라시스/Pomeriggi Musicali오케스트라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4번 +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그라시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바흐-부조니, 스카를라티, 베토벤, 브람스, 그리그, 그나라도스 등...
- 바티칸 실황 녹음 (4CD) :
베토벤 "황제", 드뷔시 "영상", 라벨 "밤의 가스파르", 쇼팽 "그랜드 폴로네이즈", 리스트 "죽음의 춤", 슈만 피아노 협주곡
- 미켈란젤리를 기억하며 (2CD) :
베토벤 "황제" (첼리비다케/파리 관현악단),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 "장송", 바흐-부조니 샤콘느, 슈만 카니발, 쇼팽 환상곡 f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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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가 들어본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설명을 해드리자면... DG 레이블로 출시된 줄리니와의 베토벤의 협주곡녹음은 많은 분들께서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인 얘기이지만, 초등학교, 중학교시절 폴리니/뵘의 연주과 무수히 비교하며 듣던 녹음입니다. 폴리니의 경우, 뵘의 관현악반주에 중점을 두고 감상하였다면, 미켈란젤리의 경우, 그 영롱한 연주에 마음을 빼았겼던 기억이 납니다. 1977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함께 드뷔시의 영상과 어린이 코너는 오랜침묵후인 1971년 내놓은녹음으로, 상당수의 분들께서는 이 곡의 절대적인 명연으로 생각하실 겁니다. 찬연하면서도 예리한 타건, 유연한 변화 등 피아노의 표현을 극대화한 훌륭한 연주입니다. 전주곡집은 들어보질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씀드릴수는 없지만, 기제킹의 녹음(EMI)과 더불어 가장 훌륭한 연주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와 라벨의 협주곡은 구하기 다소 어렵지만, 듣는 이들에게 크나큰 기쁨을 주는 연주입니다. 스위스 메모리아 레이블의 바티칸 실황녹음은 60년, 62년, 77년, 87년의 역사적 연주를 담은 4장짜리 CD로 독일 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습니다. 특히 황제 3악장의 마지막 11마디에서 팀파니의 연타위로 피아노의 E flat 화음이 아다지오로 들어서는 순간 천둥의 엄청난 굉음의 울림이 자연적인 앙상블을 빚어낸, 그야말로 전설적인 명연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CD는 Music & Arts에서 발매된 2-For-1녹음입니다. 잠시 CD가이드의 평을 빌리자면, "끝나지 않은 것처럼 이어지는 흐름에 강약완급을 적절히 배합해 곡의 마디를 만들어가는 환상적연주..."라고 되어있습니다. 황제의 경우는 음질이 아주좋을뿐더러, 첼리비다케의 생동감 넘치는 반주와, 파리 관현악단의 뛰어난 목관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선곡또한 아주 좋으므로 꼭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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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벨 : 피아노 협주곡 (EMI, 1957년 녹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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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vel : Piano Conerto In G

라벨 : 피아노 협주곡 (EMI, 7243 5 67258 2 9 : 1957년 녹음)

라벨의 이 아름다운 피아노 협주곡을 논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미켈란젤리의 유명한 음반이다. 미켈란젤리가 EMI에 남긴 음반중 슈만의 카니발과 더불어 가장빛나는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곡을 녹음 할 당시 미켈란젤리의 나이가 불혹을 앞둔 나이이지만 건반에 대한 통제력이나 음악적 성숙함은 이미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녹음이다.


피아니스트 김정원은 피아노로 연주되는 바이올린 소리같다는 표현으로 미켈란젤리의 해석을 표현하였다. 이 표현처럼 적절하게 이 협주곡의 2악장을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완벽한 기교도 중요하지만 기교를 넘어서는 것은 어떻게 연주되느냐라는 것을 느끼게된다. 미켈란젤리는 완벽한 기교 아래 이곡을 정복해 나가지만 기교를 넘어서 존재하는 음악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어느 누가 이처럼 고요한 아름다움으로 이곡을 연주해 나갈 수 있을까...


미켈란젤리는 마치 피아노라는 악기를 통하여 나즈막히 노래하는 것 같다.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그 흐름이 자연스러워 어색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루바토. 얼름처럼 순수하게 절제된 피아노 소리.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처럼 맑고 순수한 피아노 소리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물론 이 음반에 장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59년이라는 녹음연도와 스테레오 초기녹음이라는 한계, 잘 알려지지 않은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분명 이 음반의 한계를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짐머만과 블레즈가 80년대 녹음한 라벨 피아노 협주곡과 비교하여보면 모든 것이 더욱 열등해 보인다. 짐머만의 녹음에 비해 부자연스런 피아노 소리, 답답한 음향, 부족한 오케스트라의 뒷받침은 더욱 드러난다. 무엇하나 짐머만의 세련된 음반에 비해 나은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점을 덮고도 남는 아우라가 미켈란젤리의 녹음에는 존재한다. 그것은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미켈란젤리의 불세출의 연주과 해석이다. 현재 녹음에 비해 비교적 열악한 음질이나 빈약한 오케스트라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음반은 한 예술가의 위대한 숨겸을 담고 있는 것이다. 웬만큼 피아노를 칠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곡의 2악장을연주할 수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미켈란젤리처럼 2악장을 연주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것이 이 음반의 수많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50여년 동안 많은 사람들사이에서 최고의 음반으로 회자되는 까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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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람스 '발라드' , 미켈란젤리 ”

BRAHMS - 4 BALLADEN op.10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브람스 : 4개의 발라드 ( 1980년 녹음, DG 457 762-2, DG 400 043-2 )
아루트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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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리의 도이치그라모폰 마지막 녹음이다. 슈베르트 소나타와 같이 수록된 이 곡은 브람스 초기의 대표적인 피아노 작품이다. 쇼팽의 발라드 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독백과도 같은 은은한 매력을 지닌 명곡이다. 멜로디가 쏙쏙 귀에 들어오는 곡이 아닌지라, 좋아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그 선율의 아름다움은 과연 브람스 답다는 생각이 나게 만드는 숨겨진 고독이 가득하다.


무엇이 그토록 불안해 브람스는 그 젊은 날에 이러한 작품을 만들었을까... 이 곡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이나 고독의 표출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흔하게 브람스답다고 부르는 숨겨진 슬픔이 가득하다. 이 곡을 들을 때면 젊은 날의 브람스의 고뇌가 느껴진다. 브람스의 고뇌를 나이 환갑의 미켈란젤리는 이전의 연주에서 보여주었던 칼날같은 연주보다 여유와 깊이로 해석하고 있다. 젊은날의 꽉꽉 짜여진 해석도 훌룡하지만 노년의 미켈란젤리는 세월을 작품의 해석에 집어넣었나 보다. 가만히 다가와 불안을 노크하고, 계속 해서 불안을 노래한다.


미켈란젤리의 공식적인 도이치그라모폰의 마지막 녹음인 이 음반을 들을 대마다 나는 왜 미켈란젤리는 라벨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을 한 번더 녹음하지 않았을까 ?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브람스의 발라드라도 마지막으로 녹음하였다는 것에 만족해야할지도 모른다. 브람스의 매력적인 이 곡만이 미켈란젤리의 유일한 DG 브람스 녹음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리의 브람스 녹음은 변주곡 몇곡이 있지만 다른 음반들처럼 조악한 음질은 어디 내놓아도 뒤떻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EMI의 초기녹음들 정도면 그래도 훌룡한 편이다. 미켈란젤리의 음반은 디지탈 녹음이라도 40년대 녹음만도 못한 음반이 너무 많다.)


미켈란젤리는 그 위대한 음악성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실연으로 보여주었을뿐, 나 같은 사람들은 그저 그가 녹음한 음반만 쳐다보고 그의 위대함을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좋은 음질의 음반들은 필수이지만,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그나마 건진 이 귀중한 브람스의 음반을 들을 때면 감사의 마음을 가지려고 애써본다.


브람스의 젊은 날의 불안과 고독이 노년의 미켈란젤리에 의해 우리에게 다시 다가온다. 카첸의 단단한 음색도, 소콜로프의 여유로움과도 다르다. 그것은 삶의 종착역에 들어선 노대가의 독백과도 같다. 그래서 이 음반은 고독한 천재의 독백이며, 미켈란젤리의 백조의 노래이다. 서두르지 않는 템포 그 속에서 뚜렷히 살아져 전해오는 악상... 브람스가 무엇을 의도하였는지 미켈란젤리는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 같다.



그러면서 미켈란젤리는 내게 말한다. "나의 삶도 고독하였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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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뷔시 전주곡 1권, 미켈란젤리 ”

Claude Debussy - Prelude vol. 1 by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드뷔시 '전주곡 1권' (1977년 녹음, DG 413 450-2) , 아루트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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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거론 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유명한 미켈란젤리의 대표적인 명반이다. 미켈란젤리의 노년기의 녹음이지만 녹슬지않은 기교와 곡의 정곡을 찌르는 정확한 해석으로 지금까지 이곡의 최고의 명반자리에서 내려 올 줄을 모르는 음반이다. (물론강력한 도전자인 짐머만이 있기는 하지만...) 이 음반의 가치를 두고 어떤 이들은 기적이다, 다시는 태어날 수 없는 불후의 명반이다...등등 온갖 수사적 찬사들을 동원해 이 음반의 가치를 매기고 있다. 글쓴이 역시 이 의견들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에 속한다. 왜냐면 나의 미켈란젤리에 대한 애정은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리의 별스런 기행이나 독특함 그리고 완벽주의는 역사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굴드정도... 그러나 이처럼 별난 미켈란젤리의 음악세계는 전혀 별나지 않다. 굴드가 별난 삶처럼 그의 음악도 초개성으로 똘똘 뭉쳐있지만 미켈란젤리는 정확한 악보 해석, 빈틈없는 기교, 과장없는 루바토등 소위 말하는 정통파 피아니스트로 불린다. 미켈란젤리가 남들보다 눈에 뜨는 점은 정확한 악보해석과 무서울정도의 치밀하고 차가운 기교였다. 이러한 미켈란젤리의 특성에 잘 맞는 곡이 어렵기로 소문난 드뷔시의 전주곡이다. 그래서 미켈란젤리의 전주곡이 Best of Best로 꼽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드뷔시의 전주곡이 오늘 날 그래도 이정도의 대중성과 지명도를 갖게 된데에는 미켈란젤리의 막대한 공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나역시 미켈란젤리를 알기 전까지는 이 멜로디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운 이 곡의 매력을 알지 못했다.

우선 이곡은 위대한 바하의 영향을 받은 선배 작곡가인 쇼팽처럼 바하의 영향으로 24개의 조성에 따라 작곡되었다. 추가된 것이 있다면 각 곡마다 매력적인 표제들이 붙어있다는 것이다. 제목만 높고 보면 얼마나 멋진 곡일까 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키지만 불행이도 제목처럼 쉬운 곡이 아니다. (나는 이곡을 얼마나 더 들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 하지만 피아노의 음향적인 측면으 보았을 때 이곡처럼 효과적인 곡도 없다고 한다. (남들이...) 어쨌든 당시에 이러한 곡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대한한 일인 것은 분명하며 피아노의 기능적인 측면을 확장시킨 이곡의 위대함은 길이길이 역사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위대한 작곡가의 이 명곡은 미켈란젤리라는 걸출한 피아니스트를 만나 날개를 달았다. 드뷔시를 좋아해서 지금까지 많은 음반을 사고 들어왔지만, 미켈란젤리만큼의 충격을 가져다 준 음악가는 단 한명도 없었다. 첫 곡부터 미켈란젤리의 피아노 소리는 다른 피아니스트들과는완전히 다른다. 그 정교한 페달링과 핑거링을 통해서 울려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불순물이라고는 전혀없는 순도 100%의 물처럼 맑고 투명하다.


그래서 나는 이 음반을 들을 때마다 미켈란젤리라는 인간의 위대함을 물론이고 똑같은 피아노로 어떻게 남들과 다른 소리를 만들어 내는지 궁금해진다. 미켈란젤리가 이곡을 녹음 할 당시의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아무리 위대한 피아니스트라도 노년에는 기교는 예전같지 않다. 그리고 드뷔시의 이곡은 노년의 여유과 원숙함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아니다. 이렇게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리는 완벽에 가까운 소리를 만들어내었다. 개인적으로 참 무서운 인간이라는 생각이든다.


처음 이 드뷔시의 전주곡을 들었을 때 나는 거의 매일 졸았다. 정말이지 이렇게 재미없는 곡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하지만 끈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듣다보니 하나 하나 귀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피아노의 세계였었다. 리스트의 말년 작품이나 스크리아빈의 몇몇 작품에서도 이 것과 비슷한 것을 느끼지만 드뷔시의 피아니즘은 완벽하게 드뷔시만의 것이였다. 그제서야 나는 드뷔시라는 위대한 천재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그 덕분에 현대음악까지 귀동냥을 할 수 있게되었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에는 분덜리히의 음반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 처럼 드뷔시의 전주곡에서는 미켈란젤리가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있다. 덕분에 짐머만이나 베로프의 뛰어난 연주가 빛을 잃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 인간이 완성한 이 놀라운 명반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 이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드뷔시가 생존해있다면 미켈란젤리에게 절이라도 해야 될 것 같다. 스크리아빈과 호로비츠도 그렇지만 드뷔시와 미켈란젤리, 작곡가와 작곡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연주가는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왜냐면 천재는 늘 시대를 앞서가기 때문에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천재를 발견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처럼 어렵기 때문이다.



드뷔시의 전주곡 1권 표제들...

1. 델피의 무희들 2. 돛 3. 들을 지나는 바람 4. 소리와 향기가 저녁 대기속에 감돈다 5. 아나카프리의 언덕 6. 눈 위의 발자국 7. 서풍이 본 것 8. 아마빛 머리의 소녀 9. 끊어진 세레나데 10. 물에 잠긴 사원 11. 푸크의 춤 12. 민스트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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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투로 베데네티 미켈란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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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리의 이름에는 '축복' (Benedict)과 '천사 미카엘' (Michelangelo)이 이름속에 포함되어있다.
이름처럼 그의 음악세계도 종교의 엄숙함과 많이 닮아있다.
철저한 악보분석, 악보에 근거한 만큼의 낭만주의,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는 기교.
미켈란젤리는 한세대를 풍미했던 거장의 시대에서도 유달리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는 항상 완벽으로 통했다.
그의 음반이 대부분 라이브 녹음임에도 음질을 제외하면
언제나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는 미켈란젤리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인식이나, 정보는 미비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그의 삶이 칩거와 은둔으로 가득찬 삶이였기때문이였을까...
조국 이탈리아를 떠나 스위스 루가노에 정착하여 평생을 살았던 그는
그가 사랑했던 스위스의 산들처럼 언제나 자신만의 길을 걷는 타협의 여지는 전혀없는 피아니스트였다.
언제나 자신만의 길을 고집하고, 그 길만을 묵묵히 걸었던 미켈란젤리였다.
누가 그랬던가 ! 천재는 고독하다고...
그렇게 그는 험난한 고독의 길을 혼자서 걸어간 위대한 예술가였다.    

                                                                         - 2002.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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